
플라멩코가 태어난 안달루시아의 태양
세비야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주도로, 과달키비르 강을 끼고 발달한 내륙 항구도시다. 이슬람 왕조인 무어인의 지배를 오래 받았던 지역인 만큼 도시 곳곳에 이슬람과 가톨릭 양식이 뒤섞인 무데하르 건축이 남아 있으며, 이는 스페인 남부만의 독특한 미학을 형성한다. 세비야는 정열적인 춤과 음악인 플라멩코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는데, 인근의 집시 공동체가 형성한 이 예술은 오늘날에도 도시 곳곳의 타블라오라 불리는 공연장에서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다. 안달루시아 특유의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철 기온이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경우가 흔해 유럽에서 손꼽히는 무더운 도시로도 알려져 있으며, 이 때문에 현지인들은 한낮에는 그늘을 찾고 저녁 늦게 활동을 시작하는 생활 리듬을 갖고 있다. 구시가지는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이 특징인데 이는 강한 햇볕을 피하기 위해 그늘을 만들도록 설계된 결과라는 설명이 있다. 세비야는 매년 봄 열리는 성주간 행사 세마나 산타와 이어지는 축제 페리아 데 아브릴로도 유명해, 이 시기에는 도시 전체가 전통 의상과 행렬로 화려하게 물든다. 세마나 산타 기간에는 코스탈레로스라 불리는 신자들이 무거운 예수상과 성모상을 짊어지고 좁은 골목을 행진하며, 끝이 뾰족한 두건 카피로테를 쓴 나사레노 행렬과 애절한 노래 사에타가 도시 전체를 숙연한 분위기로 물들인다. 뒤이어 열리는 페리아 데 아브릴에서는 카세타라 불리는 색색의 천막이 공원 한편에 빼곡히 들어서고, 사람들은 셰리와 레몬 소다를 섞은 레부히토를 마시며 밤새 세비야나스 춤을 춘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항해 이후 세비야는 신대륙과의 무역을 독점한 통상원의 소재지가 되어 대항해시대 스페인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번영했으며, 이때 축적된 부는 대성당과 알카사르 곳곳의 화려한 장식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세비야는 인구 약 70만 명의 안달루시아 최대 도시로, 오페라 카르멘과 세비야의 이발사의 배경이 된 도시로도 문학과 음악 속에서 자주 등장한다. 오늘날 세비야 대학교 본관으로 쓰이는 건물은 한때 유럽 최대 규모의 담배 공장이었으며,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속 여주인공이 일하던 공장의 모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세비야의 구시가지는 베네치아에 이어 유럽에서 손꼽힐 만큼 넓은 역사지구를 이루고 있어 걸어서 둘러보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시내 중심가에는 메트로센트로라는 노면전차가 짧은 구간을 운행해 도보 이동의 피로를 덜어준다.
히랄다 탑에서 알카사르까지, 세비야의 유산
세비야 대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큰 고딕 양식 성당 중 하나로 꼽히며, 콜럼버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고 전해지는 화려한 관이 내부에 자리하고 있다. 이 성당은 12세기 이슬람 왕조 알모하드가 세운 모스크 터 위에 지어졌으며 완공까지 백 년 넘는 세월이 걸렸다. 성당에 딸린 히랄다 탑은 원래 이슬람 시대 모스크의 첨탑이었던 것을 개조한 것으로, 계단 대신 완만한 경사로가 이어져 있어 말을 타고도 오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이 독특하다. 탑의 이름은 꼭대기에 놓인 신앙을 상징하는 청동 풍향계 히랄디요에서 따온 것이다. 탑 정상에 오르면 붉은 지붕이 펼쳐진 세비야 시내와 과달키비르 강 너머 트리아나 지구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레알 알카사르는 무데하르 양식의 정수를 보여주는 왕궁으로, 정교한 타일 장식과 물이 흐르는 정원이 인상적이며 드라마 왕좌의 게임 촬영지로도 널리 알려지며 인지도가 높아졌다. 지금도 스페인 왕실이 세비야를 방문할 때 실제로 머무는 궁전으로, 유럽에서 지금까지 쓰이고 있는 왕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곳으로 꼽힌다. 마리아 루이사 공원 안에 자리한 스페인 광장은 1929년 이베로-아메리카 박람회를 위해 건축가 아니발 곤살레스가 설계한 반원형 건물과 다리, 운하로 이루어진 웅장한 공간으로 스페인 각 주를 상징하는 타일 벽화가 벽면을 따라 늘어서 있다. 과달키비르 강 건너편 트리아나 지구는 전통적으로 도예와 플라멩코 예술가들이 모여 살던 서민 동네로, 알파레리아 거리를 따라 늘어선 세라믹 공방과 활기찬 시장을 구경하며 세비야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날 수 있다. 강변에 자리한 황금탑 토레 델 오로는 13세기에 세워진 방어용 탑으로 지금은 해양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목재로 만들어진 현대적 건축물 메트로폴 파라솔은 라스 세타스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구시가지 위로 우뚝 솟아 대비되는 스카이라인을 만들어내는데, 공사 도중 지하에서 발견된 로마와 이슬람 시대 유적이 하부의 안티콰리움 전시 공간에 보존되어 있다. 대성당, 알카사르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함께 지정된 인디아스 종합문서관에는 신대륙 탐험과 식민 통치에 관한 방대한 고문서가 보관되어 있다. 구시가지 동쪽의 카사 데 필라토스는 무데하르 양식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이 조화를 이루는 귀족 저택으로, 안달루시아식 파티오 건축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 저택의 이름은 예루살렘 총독 빌라도의 관저를 본떠 지어졌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오렌지 향 골목에서 즐기는 세비야의 밤
세비야 구시가지를 걷다 보면 거리마다 심어진 오렌지 나무를 쉽게 볼 수 있는데, 이 오렌지는 맛이 써서 식용보다는 마멀레이드나 향수 원료로 쓰이며 실제로 영국 던디 지방의 전통 마멀레이드 원료로 오래전부터 수출되어 왔다. 세비야는 타파스 문화가 처음 시작된 곳 중 하나로 꼽히며, 얇게 썬 하몽 이베리코, 토마토 향이 살아있는 냉수프 살모레호, 병아리콩과 시금치를 곁들인 에스피나카스 콘 가르반소스, 잘게 튀긴 생선 페스카이토 프리토 등을 작은 접시로 조금씩 즐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바 카운터에 서서 이웃과 어울리며 술 한 잔에 타파스 하나씩 곁들이는 것이 세비야 사람들의 일상적인 저녁 풍경이다. 플라멩코 공연을 볼 계획이라면 관광객 대상의 대형 공연장보다 산타크루스 지구나 트리아나의 소규모 타블라오가 노래 칸테와 춤 바일레, 기타 연주 토케가 어우러지는 좀 더 진솔한 분위기를 전해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름철 폭염을 피하려면 이른 아침이나 해가 진 이후에 야외 명소를 둘러보는 것이 현명하며, 낮 시간에는 성당이나 알카사르처럼 실내 그늘이 있는 곳을 우선 방문하는 편이 좋다. 세비야는 다른 대도시에 비해 자전거 도로망이 잘 갖춰져 있어 세비치라 불리는 공공자전거로 도심을 이동하는 여행객도 많다. 세비야는 스페인 최초의 고속철도 아베가 개통된 도시이기도 한데, 1992년 세비야 엑스포에 맞춰 마드리드와 연결되었으며 지금도 두 시간 반이면 수도까지 오갈 수 있다. 이 철도망을 이용하면 코르도바나 카디스, 론다 같은 안달루시아의 다른 명소도 당일치기로 다녀오기 좋다. 페리아 데 아브릴 축제 기간에 방문한다면 전통 의상 세비야나를 입은 사람들과 함께 밤새 이어지는 춤과 음악을 경험할 수 있지만 숙박비가 크게 오른다는 점도 미리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세비야에는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으로 꼽히는 레알 마에스트란사 데 카바예리아가 있어 봄가을 시즌이면 지금도 투우 경기가 열리며, 무용가 크리스티나 오요스가 설립한 플라멩코 무용 박물관에서는 의상과 사진 자료를 통해 플라멩코의 역사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낮 시간에는 많은 상점이 시에스타 전통에 따라 오후 서너 시간 문을 닫으므로 방문 전 영업시간을 미리 확인해 두는 것이 좋다. 대성당을 둘러싼 산타크루스 지구는 중세 시절 유대인 거주 구역이었던 곳으로, 좁은 골목과 하얀 벽의 건물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어 정처 없이 걷기에 좋다. 대성당 앞 광장에서는 전통 마차 코체 데 카바요스를 타고 구시가지를 둘러보는 관광 상품도 여전히 인기가 많다.